뒷BOOK2009/09/30 02:08
어떤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과 관계 없이 눈에 들어오는 글귀들이 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쓴 것일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재미 없게 읽은 책도 딱 한 구절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면 두꺼운 책을 읽어 내려간 시간이 아깝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그 책을 도대체 몇 달을 들고 다닌건지 모르겠다.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와 사건 전개. 하지만,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지나친 기대감 때문이었거나 내게 맞지 않는 소설이었을 수도 있으나, 절반 이상은 번역탓이었던 듯. 어쨌든, 그럼에도 나에게 남은 몇구절을 기록해둔다.
 

우리는 우리한테 적합한 말만 입 밖으로 내뱉는다고 생각하지만 갑자기 다른 말이 슬그머니 빠져나가지.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는 우리도 몰라. 우리는 그 말더러 모습을 드러내라고 한 적이 없어. 대개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 말 때문에 대화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고,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예전에 부인했던 것을 인정하거나 인정했던 것을 부인하게 되지. p 289

내 입이, 내 정신이,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일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그랬다'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면서 살고 있는가. 뜻대로 되지 않아 슬프고, 뜻대로 되지 않아 재미있는, 그래서 이야기가 있고, 영화가 만들어지고 누군가는 소설을 쓴다. 모든 존재에는 다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중 하나이다. 우리가 하루 종일 수많은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p 375

짬뽕을 먹어야 할지 짜장면을 먹어야 할지, 미팅을 4시에 할지 5시에 할지, 영화를 볼지 말지, 집으로 가야할지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해야할지, 점심을 먹고 일을 해야할지 일을 마무리 하고 먹어야 할지...

생각해보니 내가 오늘 하루동안 내린 결정이 수 십개는 되는 것 같다.  일의 경중에 따라 결정하는데 걸리는 고민의 크기와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럴 때, '그것은 참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얘기하지만,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어쨌든, 결국 판단할 수 있었던거고 알고보면 그것은 '쉬운 것'이다. 결정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시간에 함께 보내버리는 짓은 하지 말자. 알고보면 다 쉽다.  



 
Posted by 슈테른
날적이2009/07/09 02:32
그녀는 그에게 입술을 내밀지 않았고, 그도 그녀의 입술을 찾지 않았다. 더 많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더 적게 행동하는 편이 천 배나 더 나은 때가 있는 법이다. 다음에 이어질 순간들을 완벽하게 이끌기 위해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은지에 대해 감수성은 이성적인 지성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도플갱어>/주제사라마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 앉아 무릎 위에 놓인 책을 읽는듯 마는듯 멍하게 읽어내려가다 이 문장을 읽고 화들짝 놀람.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몇마디를, 이래저래 복잡한 마음이 추스려지지 않아 몸도 마음도 피곤한 나에게 일부러 찾아온 문장인 것 같아 옮겨 적어둔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도,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말아야하는데.... 인간은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이 할 수 있는 동물인거야?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펑!!!!






Posted by 슈테른
뒷BOOK2009/02/12 01:23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도 계속 진실을 말해요. 바로 그들처럼. 바로 댁처럼...내가 댁한테 나하고 같이 자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면 댁은 뭐라고 말했겠어요. 저 거짓말 탐지기는 뭐라고 말했을까요.    - <눈뜬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

거짓말 탐지기는 뭐라고 말했을까? 거짓말 탐지기를 들이댔던 남자는 과연 거짓말 탐지기의 결과를 믿었을까?

진실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들이란 자신이 믿고 있는대로 진실을 몰고가는 경향이 있어서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절대로 그것을 볼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하고, 어떤 이들은 정신을 놓은 채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진실'이라 우긴다.

눈을 뜨고도 감은듯이 살고, 눈을 감아도 뜬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Posted by 슈테른
날적이2007/12/21 01:04


버스 운전사가 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눈이 머는 일이 처음으로 발생했을 때는 그 사고로 인해 사상자가 나왔는데도, 사람들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습관의 힘 때문이었다. 버스 회사의 홍보담당자도 별 고민 없이, 운전사의 실수로 인한 사고라고 발표했다. - 중략 - 이틀 뒤에는 바로 그런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해 다른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거꾸로 사고버스의 운전사가 눈이 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식으로 진실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을 하기도 하는 법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대중음악을 통째로 모욕하는 음악선생님에게 반박하며 대들고, 겨우내 자기 몸 상태 위주로 창문을 열고 닫으라는 영어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있는 힘을 다해 창문을 내리찍듯이 닫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학창시절 내내 사회에 대한 불만까지 가득 앉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은 내가 대학에 가면 학생운동을 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왜 나의 반항아적인 기질을 굳이 학생운동하고 연관지어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자꾸 듣다 보니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됐다. 학생운동? 그게 뭘까? 필요하다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학생이 안 되더라도 '운동'이라는 게 필요한 것이라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십대 초반의 추억과 고민이 모두 깃들어 있는 곳

대학에 가서 풍물패 동아리에 들어갔다. 대개 풍물패 동아리라고 하면 학생운동과 연관이 많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입학했던 1997년은 상황이 이전과는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고, 내가 처음 풍물패에 들어간 것은 장구 소리에 반했기 때문이었지 학생운동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풍물패 동아리 내에 도망 다니는 수배된 선배들이 있었고, 종종 사복 경찰들이 학교를 탐색하는 일도 일어나곤 했다. 그런 경찰들에게 이끌려, 몰래 학교에 들어왔던 선배들이 잡혀갈까봐 우리는 한창 북을 두드리다가 숨을 죽인 채 불을 끄고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철저하게 소위 운동을 한다는 선배들과 ‘운동'을 배제한 친분으로만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 아닌 노력을 했다.

선배들은 나에게 각종 문화제와 집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고, 좋은 책을 추천해주며 '운동'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선배들을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학교 성적에 대해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운동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학생으로서의 학업에 대한 자기 책임을 먼저 지고, 그렇게 열심히 해서 미국 놈들 머리 위에 올라앉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싸가지 없게 말했다. 그러면서 '운동'에 대한 당위성으로 나를 설득하라고 했고, 나는 선배들이 주장하는 '당위성'이 약하다며 전혀 동조하지 않은 채 열심히 장구만 치는 후배가 되어갔다.

나는 최근까지도 이런 내가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조차도 설득하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학생들을 위한 복지에는 무관심(은 아니었는데…)하고, '대의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부르짖는 운동이 과연 누구를 위한 운동인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너는 핑계를 만들었던거야.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몇 달 전, 내가 너무 당당하게 '운동'에 관심을 두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자, 한 선배가 이렇게 말을 했다. 쉬지 않고 내 얘기를 늘어놓던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맞다. 핑계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는 선배가 건네주는 자료집 하나 제대로 보지 않았었다. 눈에 보이는 모습에 사실 겁에 질려버렸던 것이다. 수배되어 도망 다니는 선배들의 모습과 그 때문에 엉뚱한 이름으로 우리 집에 배달되야만 했던 편지. 그 속에 있던 무시무시한(?) 내용을 보며 나는 먼저 몸부터 웅크렸다.

나는 '운동'에 대한 당위성을 앞세워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운동'에 동참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보다 앞서 중요한 문제는 내가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뭔가를 알고서 한 소리냐는 것이다. 결국, 이유 있는 운동 거부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채 괜히 센척한 것뿐이다. 한 마디로 비겁했다.

대한민국의 하루하루가 365일 내내 조용할 날이 없는데, 나만 조용하다. 왜? 잘 모르니까.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

겨울이 되면 길을 걷는 내내 눈에 들어오는 길 위의 안쓰러운 사람, 광화문 사거리에서 쉰 목소리로 BBK 특검을 외치는 사람, 이제는 간간이 소식을 듣기도 어려운 KTX 해고 여승무원….

이 사람들을 볼 때마다 코끝이 빨갛게 변하는 연민이 있으면 뭐하나. 내 무지함 때문에 그 사람들을 그렇게 등 뒤로 스쳐지나 보내기만 한다면, 빨갛게 변하는 내 코가, 거짓말 때문에 길어진 피노키오의 그것보다 더 부끄러운 흔적일 뿐인 것을.

90년대 이전 학생운동의 격렬함에는 못 미치지만, 뒤를 이어 '운동'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에 의해 지금도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아니, 화염병이 날아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격렬함이 덜하다고 할 수도 없다. 사회는 여전히 혼탁하고 시끄럽다. 어쩌면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할 시점일지도 모른다.

내 작은 관심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시건방진 생각은 안 한다. 하지만, 적어도 뒷걸음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주제 사라마구가 소설에서 말했듯 진실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되는 ‘꼬라지’를 보지 않으려면 말이다.

* 예전 썼던 글을 살짝 수정하여 옮겨봅니다. 오래 전이 쓴 이 글이, 더 이상 나와 친구들에게 유효하지 않은 불필요한 글이 되기를...


 

Posted by 슈테른